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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바람 따라
글과 사진. 박동식(여행작가)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 ‘문경새재’
조선 시대에는 유명한 여섯 개의 대로가 있었다. 의주로, 강화로, 경흥로, 평해로, 삼남로, 영남로 등으로 모두 한양을 중심으로 한 도로들이다. 의주로와 경흥로는 북쪽, 강화로는 서쪽, 평해로는 동쪽으로 향했다. 나머지 두 개의 대로인 삼남로와 영남로는 남쪽으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부산까지 이어진 길이 바로 영남로다. ‘새재’라는 이름에는 여러 의미가 전해온다.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고개’ ‘새(新) 고개’ 등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구전에 의하면 ‘새도 넘기 어려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鳥嶺)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백두대간의 조령산을 넘어야 하는 새재는 험난한 고개였음이 분명하다. 매표소를 지나 10여 분을 걸었다. 그리고 만난 조령제1관문. 바로 주흘관이다. 홍예문 위에 팔작지붕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문경새재에는 모두 세 개의 관문이 있다. 조령제1관문을 비롯해 조령제2관문인 조곡관과 조령제3관문인 조령관이다. 세 개의 관문 중에 주흘관이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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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문경새재 제1관문 / 02  문경새재 지름틀바위
석교를 지나다가 잠시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석교 아래 물줄기는 주흘관의 오른쪽 성벽 수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 구석진 자리라 나그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수구 역시 주흘관처럼 홍예문 양식이었다. 두 개의 기둥 위에 판자 모양의 넓은 돌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는 꽃봉오리처럼 장식했다.
작은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제1관문을 지나자 좌측에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이 촬영된 야외 세트장이다. 다리를 건너자 순식간에 다른 세상이었다. 몇 번 촬영하고 용도가 끝난 세트장이 아니고 지금도 활발히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세트장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도 이제 막 촬영이 끝난 덕분에 조선 시대의 ‘광화문’ 앞에 주차된 승용차와 트럭을 볼 수 있었다. 실제 크기의 75% 크기로 제작된 세트는 꽤 현실감 있었다. 촬영장비들이 오가는 것이 오히려 생경할 정도였다. 궁궐과 저잣거리들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걸었다.
조령제2관문으로 향하는 길은 평지에 가까운 오르막이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부담 없는 산책 코스다. 바닥은 단단한 황토다. 좀 더 자연을 만끽하고 싶다면 맨발로 걸어도 좋다. 발을 씻을 수 있는 곳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마무리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황톳길을 몇 백 미터 오르자 우측에 기다란 바위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뱀의 머리를 닮기도 한 이 바위의 이름은 ‘지름틀바우’다. 표준말로 하면 ‘기름틀바위’인 셈이다. 기름을 짤 때 사용하는 기름틀과 모양이 흡사해서 붙은 이름이다. 바람이 불거나 폭우가 쏟아지면 언덕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지만 실상은 매우 안전한 바위다.
숲은 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녹음이 짙었다. 새재길과 나란히 흐르는 계곡도 여름 계곡처럼 청명했다. 지름틀바우를 지나고 만난 건 조령원터였다. 돌담에 둘러싸인 조령원터는 문경새재를 넘나들던 옛사람들의 흔적이 깊게 배인 곳이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공무로 문경새재를 넘나들던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험하고 고단한 새재를 넘어야 했던 그들에게는 더 없이 귀한 시설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출입구의 흔적과 돌담만 남았지만 이곳에서 고단한 몸을 뉘었던 그들을 생각하면 천년의 세월도 어제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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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문경새재 조령원터
조령원터에서 약 700m 정도를 올라가자 이번에는 교귀정을 만났다.
새로운 경상감사가 부임할 때면 이곳에서 신구 감사가 만나 인수인계 행사를 했다. 교귀정에서는 유독 계곡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계곡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계곡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 물줄기는 몇 미터를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계절을 잊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조령제2관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만난 또 하나의 옛 흔적. 이곳을 지나던 나그네들의 바람이 차곡차곡 싸인 소원성취탑.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들은 장원급제를 빌었을 테고, 보부상들은 번창을 기원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평생 자신의 소원은 빌어보지도 못한 부모들은 오로지 자식의 건강과 행복만 기원했을 것이다. 수십 개에 이르는 탑은 오늘날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더 높아지고 다져지기도 했다.
조령제2관문을 코앞에 두고 조금 색다른 표석을 만났다. ‘산불됴심’ 표석이었다. 한글로 선명하게 음각된 표석의 정확한 설치 연대는 알 수 없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우리나라에 고어로 된 비석 중에 순수하게 한글로만 새긴 비석은 이것이 유일하다. 예나 지금이나 산불에 대한 경각심은 한결같았던 모양이다. ‘산불됴심’ 표석을 지나고 굽은 길을 돌아서자 드디어 석교 건너에 조령제2관문인 조곡관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흘관처럼 홍예문에 팔작지붕 누각이 올라선 모습이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새들도 넘기 힘든 고개라지만 본격적인 고개는 이제부터였다. 그럼에도 이곳부터 새들이 모습을 감춘 이유가 자못 궁금할 뿐이었다. 관문까지는 무리였다. 갔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 나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갔던 길을 되짚는 사이 어딘가에 숨어 있던 새들이 울기 시작했다. 교~교~교~교~ 새들의 울음소리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따라서 자꾸만 언덕 아래로 향했다.
태조 왕건의 사연을 품고 있는 ‘고모산성’
문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가 고모산성이다. 이곳 역시 한양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영남로의 길목이다. 특히 이곳은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문경새재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거리다. 고모산성 입구에는 성황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신을 모신 집이다. 성황당을 지나자 저만치 앞에 문루가 보였다. 문경새재의 주흘관이나 조곡관과는 달리 ㅁ자 모양의 석문이었다. 문루에서 성벽을 따라 우측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리는 짧아도 제법 가파른 구간이었다. 성벽 정상에 올라서자 주변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모산성의 성벽은 물론이고 호리병 모양으로 흘러드는 영강의 모습도 시원하게 펼쳐졌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이야기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삼국 시대와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6·25전쟁 때까지도 이곳은 늘 격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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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05  고모산성
언덕을 내려와 이제는 반대 방향의 산성을 걸었다. 일명 ‘토끼비리’라는 옛길이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정도로 비좁은 길이다. ‘비리’는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뜻하는 경상도의 방언이다. 고려의 태조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곳에서 길을 잃었으나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후 이곳을 토천(兎遷)이라고 불렀고 토끼비리라는 이름도 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사람의 발길에 반질반질해진 암반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우거진 숲 너머로 영강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작은 언덕 하나를 넘고 영남로 옛길과 등반로가 갈리는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다.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산이라도 넘고 싶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목에서는 반질반질한 암반뿐만 아니라 역광으로 빛나는 영강까지도 숲 사이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래전 이 길을 걸었던 그들도 보았을 빛들이었다.
한번 맛보세요!

문경약돌한우
문경약돌은 거정질화강암으로 문경에만 분포되어 있는 석재다. 문경약돌한우는 문경약돌을 배합한 사료를 먹고 자란다. 일반적인 물도 알칼리로 변화시켜주는 약돌 덕분에 문경약돌한우는 육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돌한우와 더불어 약돌돼지도 문경의 특산품이다.
- 주소 : 문경읍 문경대로 / 전화 : 1588-9075
함께 들려보세요!

옛길 박물관
문경새재를 넘나들었던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여행 방식을 살펴 볼 수 있고 문경새재 아리랑에 대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문경새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옛길의 흔적과 함께 고지도들도 살펴볼 수 있다. 문경새재도립공원 매표소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 전화 : 054-550-8372 / 어른 1,000원, 어린이 및 청소년 7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