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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심리
글. 강성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베스트힐스병원 원장)
영화를 보면서 무인도에 가져갈 하나를 상상해본적이 있다. 주인공 톰 행크스 만큼 유명한 배구공 윌슨이 나오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 주인공 톰 행크스는 전 세계를 누비는 성공한 직장인 워커홀릭이다. 어느 날 비행기 사고로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정말 죽을힘을 다 해 먹을 것을 찾고 사냥을 익혀가며 버틴다. 하지만 정작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부족한 먹거리가 아니라 외로움이었다. 온종일 얘기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절대 고독에 지쳐가는 그에게 버틸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윌슨’이었다(주인공은 바닷가로 떠내려온 윌슨회사의 배구공에 사람처럼 얼굴을 그려 넣고 윌슨이라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는 마치 친구처럼 대하고 대화하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고작 배구공이지만 윌슨을 사람처럼 애지중지하며 무인도 생활을 버티던 그는, 무인도를 탈출 하던 중에 거친 파도 속에서 윌슨을 놓치고, 윌슨을 잡으려면 스스로 뗏목을 놓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결국 윌슨을 놓치고 마치 친구를 놓친 것처럼 흐느껴 우는 주인공을 보면서, 사람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왜 고독이라 하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에게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하나는 주저없이 ‘사람’이 되었다. 무인도가 힘든 이유는 말 그대로 사람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 감옥에 보내는 이유도, 사회적 연결, 즉 사람을 차단하는 것이 사람에게 내리는 가장 큰 벌이기 때문이다.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죄수에게도 ‘독방’이라는 더 큰 벌이 있기 때문에 교도소에서의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바로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외롭다는 감정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30년간 외로움이 사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사회신경과학의 창시자 존 카치오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외로움은 단순한 감정적 고통이 아니라 건강, 지능, 성공에도 악영향을 준다.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스트레스 수치가 50% 더 높았고, 고혈압 발병률이 37%, 심장마비 확률도 41% 더 높게 나타난 반면, 신진대사율과 면역력은 각각 37%, 13% 더 낮았고 사망률도 25% 더 높게 나타났다. 더불어 사회적 만족도와 소득수준도 각각 35%, 8% 더 낮게 나타났다. 이렇게 고독은 고통이 되고, 말 그대로 혼자가 환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니 무인도에 떨어지길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진료하다 보면 의외로 중년 이후 주변을 스스로 무인도로 만들고는 나이가 들어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실제로 노년은 준비하지 않으면 삶이 무인도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매일 얼굴 대하고 살던 자식들이 독립해 나가고, 아침마다 만나야만 했던 직장동료들도 은퇴와 동시에 안녕이다. 하나씩 둘씩 먼저 세상을 떠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배우자마저 죽고 혼자만 남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고독과 불안은 우울증을 부른다. 우리나라가 1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부끄럽게도 OECD 국가 노인 자살률이다. 다른 나라보다 무려 평균 3배나 높은, 10만 명당 160명이 매년 자살로 세상을 떠난다. 가장 위험한 이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노인들이고 우울증은 상실, 즉, 자신에게 의미 있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때 걸리기 쉽다. 그래서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된 노인, 특히 사별 후 6개월 이내인 노인들이 위험도가 가장 높다. 만약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을 대신 채워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관계들을 충분히 만들어왔다면 그 고통의 시간을 훨씬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똑같이 나이가 들어도, 평소 주변에 어떤 관계를 만들어 왔느냐에 따라 어떤 이에겐 노후가 무인도나 감옥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겐 여전히 행복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은 바로 ‘사람’이고, 노년은 젊었을 때보다 더욱 ‘사람’이 필요한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 시작하면 늦다. 지금 고독한 노인들도 청년, 중년 때부터 고독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는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의 소중함을 모르고 경시했을 뿐이다. 노년을 심리적 무인도에서 살게 될까 걱정된다면, 노후에 돈이 없어 불행해질까 걱정하는 시간의 반의반이라도 지금 바로 내 옆의 사람들을 챙기고 관계를 가꿔나가는데 에너지를 써야 한다. 교회나 절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 동네 이웃들, 동호회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친구들, 무엇보다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배우자와 가족, 그리고 오랜 벗들. 그들이 내 노후를 고독과 우울증에서 구하고, 행복으로 채워줄 가장 큰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