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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바 강 하구에 건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청동의 기사』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백여 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다. 핀란드만 연안에 지어진 이 도시는 운하와 다리가 많아 ‘북방의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또한 19세기 러시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문인과 작품들을 낳았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서사시 <청동의 기사>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작을 알아보자.

글·사진 이준명(작가)
인용 『푸슈킨 선집』, 민음사, 2011

유럽을 향한 창, 상트페테르부르크

<청동의 기사>는 “그는 위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대제’이다. 1703년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네바강 하구를 빼앗은 표트르는 이 땅에 서유럽을 본뜬 새 수도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발트해와 연결되어 유럽으로 진출할 발판으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를 건설하기에는 자연조건이 매우 열악했다. 첫째, 날씨가 나빴다. 일조량이 적어 태양을 볼 수 있는 날이 1년 중 62일밖에 안 됐고, 겨울이면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뼈가 시렸다. 둘째, 홍수가 잦았다. 네바강 하구 지역이라 강물이 범람하기 일쑤여서 도시가 건설된 후 250년 동안 공식적으로 기록된 홍수만 142번에 달했다. 셋째, 지반이 약했다. 물기를 먹은 습지가 대부분이라 건물을 세우기에는 땅이 너무 물러서 수많은 말뚝을 박고 돌덩이를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도 표트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서유럽을 시찰하고 온 표트르는 바다를 통해 유럽과 연결하는 것만이 러시아를 근대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도도히 흐르는 네바강을 바라보며 표트르는 다음처럼 선언했다.

“이곳에 도시가 세워지리라.
자연은 우리에게 이곳에 유럽을 향한 창을 뚫고
해안에 굳센 발로 서라는 운명을 주었도다.”

약혼녀를 앗아간 네바강의 홍수

<청동의 기사>에서 주인공은 예브게니라는 젊은이다. 하급 관리로 고작 2년을 복무했기에 아직 가난했지만 작은 꿈을 간직하고 있다. 약혼녀 파라샤와 꾸려나갈 신혼 생활이다. ‘결혼할까? 왜 안 돼? … 소박하고 평범한 거처를 어떻게 해서라도 마련하고 파라샤를 편안히 살게 해야지…. 무덤으로 갈 때까지 우리 둘이 손잡고 살아야지.’ 하지만 예브게니의 단꿈은 어느 날 밀어닥친 홍수로 깨어지고 만다. 네바강이 역류해 도시가 침수되어 허리까지 물에 잠겨버린 것!

예브게니는 광장에 나와 강 건너 파라샤의 오두막을 바라본다. “오막살이가 있는데… 그곳에, 그네들이… 과부와 딸이, 그의 파라샤가, 그의 꿈이 있는데…”라며 안타까워할 뿐 어찌할 방도가 없다. 홍수가 잦아들고 나서야 배를 구해 강을 건넌 후 파라샤의 오두막이 있던 강변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낯익은 그 장소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아아, 그들의 집이 있던 장소가 여긴데. 나의 파라샤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제정 러시아의 상징, 궁전 광장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황제가 머물던 궁전이 여럿 있지만 궁전 광장에 자리한 겨울궁전이 특히 눈길을 끈다. 여름에 더위를 피해 도시 외곽에 머물던 황제는 겨울이 오면 시내로 돌아와 겨울궁전에서 집무를 보았다. 길이 150m에 방이 1,000개가 넘는 겨울궁전은 유럽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에메랄드빛으로 칠해진 외벽에는 기둥 400여 개가 당당히 늘어서 있다. 현재 겨울궁전은 예르미타시 박물관으로 사용되어 더욱 유명하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이 박물관에는 300만 점에 달하는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겨울궁전이 들어선 궁전 광장이야말로 제정 러시아의 정치적 상징으로, 19세기 유럽을 호령했던 러시아의 국력을 잘 보여준다. 이에 푸시킨도 <청동의 기사>에서 표트르가 건설한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나는 사랑한다, 너의 엄격한 균형 잡힌 모습을. 네바의 위풍당당한 흐름을, 너의 화려한 대리석 강변을,”

- 표트르 대제를 형상화한 청동 기마상

데카브리스트 광장과 청동 기마상

겨울궁전에서 나와 네바강 변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면 정원처럼 꾸민 광장이 나온다. 1825년 황제 니콜라이 1세에 대항해 반란이 일어났던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다. 자유주의 사상을 접한 러시아군 장교들이 전제정치와 농노제에 항의하며 봉기했다가 황제의 군대에게 진압됐고, 반란 주동자 5명이 사형에 처해지고 120여 명이 시베리아 유형을 갔다. 푸시킨도 반란에 동조했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도시를 떠나 있었기에 처벌을 면했다. 하지만 뜻을 같이했던 친구들이 사형과 유배에 처해지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피할 수 없었다.

데카브리스트 광장 한쪽에는 커다란 화강암 대좌 위에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1782년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작품이다. 네바강을 향해 앞발을 쳐들고 포효하는 모습이 실로 생동감이 넘친다. 당장이라도 바위에서 뛰어내려 강변을 질주할 듯하다. 푸시킨이 1833년에 발표한 <청동의 기사>가 이런 상상을 서사시로 구현한 작품이다. 자연의 힘마저 거스르고 습지 위에 인공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성난 네바강 위로 한 팔을 뻗은 우상이 청동의 말 위에 타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아무리 많은 민중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러시아의 번영을 위한 전진뿐이다.

청동 기사에게 쫓기는 예브게니

홍수로 약혼녀를 잃은 예브게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도시를 떠돌아다닌다. 그러다 광장에서 청동 기마상과 마주친다. 이 모든 불행은 “파멸을 부르는 의지로 바다 밑에 도시가 세워지게 만든 그 사람”, 즉 표트르 대제 때문이 아닌가.

미쳐버린 예브게니는 기마상 주변을 맴돌며 황제의 얼굴에 사나운 시선을 던진다. 아,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청동 기사의 얼굴이 분노로 불타오르더니 말을 탄 채 예브게니를 쫓아오는 게 아닌가. 달아나는 예브게니 뒤로 천둥처럼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감히 황제를 힐난하는 불경을 저질렀다고 호령하듯이. 며칠 후 예브게니는 폐허가 된 텅 빈 오두막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사랑하는 파라샤의 옛집을 찾고서야 안식을 얻은 것처럼.

<청동의 기사>는 182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실제로 일어난 대홍수를 배경으로 삼았다. 습지 위에 말뚝을 박고 돌덩이를 채워 만든 이 도시는 그야말로 인간의 힘으로 이룩해낸 거대한 역사(役事)였다. 하지만 자연을 거스른 대가는 엄청났다. 도시를 세우는 동안 7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로도 반복되는 홍수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건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제정 러시아의 눈부신 번영만큼이나 커다란 슬픔이 흐르고 있다.

- 러시아 황제의 집무실로 쓰였던 겨울궁전

- 여름철 백야가 찾아온 궁전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