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함브라 궁전
19세기 미국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가이자 전기 작가인 워싱턴 어빙은 에스파냐의 그라나다 지방에 머물면서 겪은 일과 전해 들은 알함브라 궁전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를 담아 『알함브라』를 펴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알함브라는 그 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올랐다.
글·사진 이준명(작가) 인용 『알함브라 1, 2』,
생각의 나무, 2007
스페인에 핀 이슬람의 꽃, 알함브라
1826년 미국 외교부 공사관인 워싱턴 어빙(Washinginton Irving, 1783~1859)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부임했다. 3년쯤 지나 업무에 익숙해지자 친구와 함께 스페인 남부로 여행을 떠났다. 스페인은 기독교 전통이 강한 나라이지만 남부를 여행하면 이슬람문화가 자주 눈에 띈다. 스페인이 자리한 이베리아반도가 8세기경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다. 강력한 이슬람 군대는 기독교 세력을 반도 북쪽으로 밀어붙인 후 남부지방을 지배했는데, 이후 이들을 ‘무어인’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도와 무어인 사이의 대립은 무려 800년간 지속되었고, 오랜 세월 무어인의 지배를 받은 남부 지방에는 이슬람문화가 스며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그라나다(Granada)로, 무어인의 마지막 왕국이 있던 곳이다.
그라나다에 도착한 어빙은 태수의 허락을 얻어 알함브라(Alhambra) 궁전 한편에 숙소를 정했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으로, 이슬람교의 발상지인 중동지방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하다. 궁전 입구로 들어서면 길쭉한 모양의 연못이 설치된 중정(中庭)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중정 너머로는 45m 높이의 코마레스 탑이 우뚝 솟아 있다. 무어인 왕의 권세와 위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왕이 외국 사절단을 맞이하던 ‘대사의 방’으로 연결된다.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이면 누구나 저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벽 전체를 가득 채운 아라베스크의 화려함 때문이다. 아라베스크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벽이나 공예품에 사용하는 아라비아풍 무늬를 뜻한다.
그라나다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된 어빙은 알함브라 궁전에 몇 달간 머물렀다. 심심했던 어빙은 홀로 궁전을 어슬렁거리며 남부지방의 전설과 민담들을 수집했다. 늙은 퇴역 병사를 비롯한 현지인들이 어릴 때 조부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주었다. 그 속에는 알함브라에 어울리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가득했다. 특히 ‘사랑의 순례자, 아흐메드 알 카멜 왕자’ 이야기가 어빙의 귀를 사로잡았다.
물이 넘쳐흐르는 천국, 헤네랄리페
먼 옛날 그라나다의 무어인 왕에게 ‘아흐메드’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점성술사들은 왕자가 장차 훌륭한 군주가 되겠지만, 사랑 때문에 엄청난 위험을 겪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왕은 아들을 어른이 될 때까지 사랑으로부터 떼어놓기로 결정했다. 알함브라 산꼭대기에 아름다운 성을 짓고, 그 주위에 높은 벽을 쌓은 후 왕자를 가두어버렸다. 오늘날 ‘헤네랄리페(Generalife)’라고 불리는 정원이다.
헤네랄리페는 왕의 여름 별궁으로 ‘물의 정원’이란 뜻이다. 스페인 남부는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이 강해서 매우 건조한데도 헤네랄리페에는 항상 물이 넘쳐난다. 50m에 이르는 긴 연못이 정원을 가로지르고 곳곳에 설치된 분수가 시원한 물을 뿜어 올린다. 모든 것은 멀리 떨어진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눈이 녹은 물을 끌어온 덕분이다. 그라나다를 지배한 무어인의 뛰어난 기술과 강인한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지중해 땡볕에 시달리다가 헤네랄리페에 들어오면, 한여름에 에어컨 바람을 쐬듯 청량감이 느껴진다. 정성껏 다듬은 나무 터널을 지나 분수가 물을 뿜는 정원에 다다르면 지상천국이 따로 없다 할까.
아흐메드 왕자는 헤네랄리페에 갇힌 채 현자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현자는 왕자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새들의 언어를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왕자가 스무 살이 된 해 봄, 온갖 새들이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왕자의 가슴 속에 질문이 피어났다. ‘이 사랑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어느 날 매에게 쫓겨 들어온 비둘기가 왕자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것은 혼자에게는 고통이고, 둘에게는 행복이며, 셋에게는 싸움이자 원한이랍니다. 그것은 두 존재를 끌어당겨 하나로 모아주고, 달콤한 애정으로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마력이랍니다. … 아, 가여워라, 나의 왕자님! 그 많고도 소중한 청춘의 나날들을 사랑도 못 하고 보내셨단 말인가요?"
- 헤네랄리페 정원
- 톨레도
사랑을 찾아 떠난 왕자의 모험
왕자는 그제야 세상에 ‘사랑’이란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성에 갇힌 채로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법. 그러던 어느 날 비둘기가 왕자에게 한 가지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 정원에서 왕자에게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공주를 발견했다고. 그 말에 가슴이 뜨거워진 왕자는 미지의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써서 비둘기 편에 보냈다. 하지만 비둘기는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냥꾼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왕자의 품에 안겨 공주의 이름도 말하지 못한 채. 이에 왕자는 결심했다. “나는 끔찍한 감옥인 이 성에서 달아나겠어. 그리고 사랑의 순례자가 되어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그 미지의 공주를 찾아낼 거야.”
성에서 탈출한 왕자는 여러 도시를 헤맨 끝에 공주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아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공주는 기독교 왕의 외동딸인 알데곤다 공주였던 것! 그녀는 철옹성 같은 성벽으로 유명한 톨레도(Toledo) 성안에 살고 있었다. 왕자처럼 위험한 사랑에 빠질 거라는 예언 때문에 열일곱살이 될 때까지 격리되어 있었다. 왕자와 공주에게 내려진 예언은 정확했다. 이슬람교도 왕자와 기독교도 공주 사이의 사랑이라니 이보다 위험한 불장난이 어디 있겠는가.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70k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중세도시이다. 타호강이 U자 모양으로 휘감은 언덕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놓여 있다. 톨레도는 예로부터 스페인 기독교의 중심지였으며, 이슬람 세력의 북진을 막아내는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타호강 건너편 언덕 위에 서면 성안이 내려다보인다. 힘든 여정 끝에 톨레도에 도착한 왕자도 이 언덕 위에서 성을 바라보았을 테다. 과연 아흐메드 왕자는 기독교의 심장부에 갇힌 공주를 구해낼 수 있을까?
무어인이 남기고 떠난 보물
어빙은 그라나다에서 수집한 전설과 민담을 모아 1932년 『알함브라』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크게 두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바로 무어인의 마법과 보물이다. 기독교도들은 오랜 전쟁 끝에 무어인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지만, 언제든 그들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산속 동굴 어딘가에 마법에 걸린 무어인 군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언젠가 그들이 깨어나 잃어버린 옛 땅을 찾으러 올 테니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랄까.
무어인의 보물은 좀 더 현실성 있는 이야기다. 기독교 군대에 쫓겨 급하게 이 땅을 떠난 무어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보물을 궁전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았다. 이 보물만 찾으면 한평생 먹고살 걱정이 없다니 요즘으로 말하면 로또에 당첨된 것과 다름없다. 이에 수많은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꿈에 부풀어 궁전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무어인이 남기고 떠난 가장 큰 보물은 따로 있다는 걸. 이슬람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알함브라 궁전이야말로 세상에 자랑할 만한 보물이 아니던가.
- 코마레스 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