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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글.  고미령 한양대학교의료원 재직

친구들과 모임을 마친 후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지하철을 타려고 역에 들어섰는데 3호선과 4호선의 환승역인 충무로역은 주말인 탓에 이전보다 많은 승객으로 붐볐다. 목적지 방향으로 줄을 서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멀찍이서 지팡이를 탁탁거리며 걸어오는 한 남학생을 보게 되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그 학생은 시각장애인이었다. 병원에서 청각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장애아동을 많이 접해본 나로서는 당연히 그 학생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학생이 어떻게, 어디쯤 줄을 섰는지 보게 되었고, 지하철이 들어오는 신호음이 들렸지만 맨 끝으로 되돌아가 학생의 옆에 섰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가요? 어디까지 가세요?” 학생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자주 다니는 길이라 개찰구부터 타는 곳까지 길을 외우고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괜찮다는 학생의 말에도 혼자서 가도록 놔두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하철역마다 안전 스크린이 있긴 하지만 역에 따라서 지하철과 타는 곳 사이의 틈새가 크게 벌어진 곳도 있어, 자칫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역 밖으로 나오면 횡단보도로 길을 건너 자택으로 걸어가기까지 무수한 위험요소가 있을 것이라는 염려가 가득했기에 학생의 귀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같이 갑시다! 학생이 집으로 안전하게 귀가하는 걸 봐야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호의에 학생은 괜찮다고 계속 손사래를 쳤지만 나의 의지가 단호하자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그렇게 우리는 학생의 집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언젠가 교회에서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내가 학생보다 반보(步) 앞서고 학생에게 팔꿈치 윗부분을 잡게 하여 길을 안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배웠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학생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끌었고, 횡단보도 앞에서 길을 건너는 것이 늘 걱정되었다는 학생의 근심을 뒤로 하고 안전하게 길을 건넜다. 아무리 익숙하고 외운 길이라 하지만, 지팡이에 의지했을 때 보다 온전히 사람에게 의지하며 걸어가는 학생의 마음이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까 생각하니, 가는 내내 마음이 흐뭇하기만 했다.
막대 지팡이의 두드림과 감각으로만 오가던 외로운 길을, 조심스럽게 다닌다고는 하나 스스로 안전을 책임지며 다녀야 했던 길을, 오늘은 사람의 온기(溫氣)와 함께 따뜻한 안내를 받으며 귀가하게 되어 행복했다는 학생은 나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비록 7개의 지하철역을 더 돌아서 오게 되었지만, 행복하고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문득,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故 강영우 박사님이 떠올랐다. 그분은, 시력상실이라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유학 과정까지 마치면서 마침내 미국의 고위 공직자 500인 중 한 명으로 자랑스러운 이름을 남겼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교육 환경이나 여건이 잘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꿈꾸며 성공적인 삶을 일궈온 그분의 다큐멘터리는 큰 감동으로 남아있었다.
언젠가 서점에서 책으로 접했던 신순규 선생님의 사연도 생각났다. 그분은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공인 재무 분석사로, 미국의 월가(Wall street)에 있는 세계적인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애널리스트(Analyst)였다. 그분의 눈물겨운 성공 사연 또한 감동적이었지만, 특히 그분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는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첫 성공사례가 되고자 그 분야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이 쓴 점자 편지를 읽고, 또한 답장을 보내려고 점자 공부까지 했다는 부모님의 사연은 자식을 향한 사랑 그 자체였다. 남들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 얻어질 결과물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며 견뎌야 했을까? 도저히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손가락 지문이 닳을 때까지 수많은 점자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꿈꿨던 미래가 있었기에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어주고 있으리라….
우연히 길 안내를 도와주게 된 시각장애인 학생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밤이었다. 지금까지 온전한 두 눈으로 책을 읽을 수도, 영화를 즐길 수도,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볼 수도 있었던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얼마나 감사한 삶인가? 하고 말이다. 내가 학생을 도와준 것은 비록 길 안내가 전부였지만, 나 역시 현재의 삶을 반추하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시각장애의 힘겨운 현실을 안고도 훌륭한 삶의 모범이 되어주신 두 선생님의 사례처럼 지하철에서 만난 학생도 꼭 그렇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장애를 극복하고 꿈으로 도약하는 멋진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의 꿈도 견고하게 이뤄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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