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스승의 날에도 어김없이 그에게 연락이 왔다. 늦은 저녁 시간
때였다. 그는 대학원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연락을 드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와 이런 연락이 시작된 것이 어느덧 10년째 접어든다. 그는
서울에서 소방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근무가 끝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울 모 대학 소방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80년대 말 3월이었다. 같은 반 아이들보다 한
살이 더 많고 유독 짙은 눈썹에 날카로워 보이고 불평불만으로 세상
다 산 것처럼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교실 구석 맨 뒷자리에 앉는
학생. 그해 2학년 담임이었던 나는 자습 시간, 조·종례 시간, 수업
시간마다 자꾸 그에게 눈이 갔다. 그의 아버님은 스님이셨다. 그를
낳은 어머님은 어느 날 젖을 뗀 그를 이불 포대기에 싸서 아버지가
계신 절을 찾아와 맡기고 떠나 버렸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절에서 아들을 키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웃 절에
있는 친구 스님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매월 쌀과 생활비를
보내주면서 맡기게 되었다. 그는 유아 시절을 그 절에서 보내게
되었고,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는 학교와 가까운 절로 옮겨
생활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또다시 중학교가 있는 마을로
옮겨 조그만 방을 구해서 아버지가 보내준 생활비로 혼자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어서는 진학보다는 스님이
되려고 아버지의 친구 스님이 계신 절에서 1년간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2학년이 시작되는 3월부터 그동안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시던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수소문하여 자신이
거주하던 아버지 친구분의 절에도 가서 아버지의 상황을 확인하려고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그는 방세를 내지 못해서 자취방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아는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숙식을
해결하는 처지가 되었다.
3월 중순 어느 날, 교무실로 찾아와 더 이상 야간자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시절은 지금과 달리 아픈 학생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학생이 1, 2학년은 9시까지, 3학년은 10시까지 야간자습에
참여하던 때였다. 저녁 시간에 아는 형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해주는 대가로 숙식을 해결하게 되어 야간자습에
참여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일단 한번 두고 보기로 하고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4월이 접어들고 나서 그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휴대전화기도 없는 시절이었고, 더군다나 그의 거처를 알 수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시내 어느 가게에 있을 거라는
말만 듣고 야간자습을 마친 9시 이후에 식당을 찾아다녔다. 사흘이
지났을 때 반 아이로부터 그가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만화방, 오락실, 당구장 등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내일이 소풍 가는 날이라 그 전날은 야간자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저녁을 먹고 본격적으로 시내 일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시내에 조금 벗어난 뒤편 골목에 자리 잡은 2층 당구장을 찾아
들어가게 되었다.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혼자 걸레질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그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황급히 담뱃불을 끄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당구장에서 일해주고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 학교에
오지 않고 여기서 뭐 하니?”라는 나의 물음에 그는 “선생님, 학비도
없고 부모도 없는 놈이 학교 다녀봐야 뭘 하겠습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 또한 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그
이후의 대책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어쨌든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일단 학교에 와! 방법은 내가
찾아볼게”라고 말해 버렸다. 그리고는 “내일이 소풍날이니까, 편한
마음으로 바람 쐰다고 생각하고 일단 내일 와!”라고 하면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여주었다.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해서 하나는
네가 먹고 하나는 내 것이니 가지고 와라”라고 말한 뒤 내일 꼭 올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다음날 그는 약속을 지켰고, 출석 점검을 하는데 앞으로 성큼 나와서
나에게 도시락 하나를 내밀었다. 우리는 그냥 서로 씽긋 웃었다.
그날 이후 그는 나를 믿고 학교에 나와 주었다. 아무래도 야간자습
참여는 어려울 것 같다는 그에게 당구장에서 일하지 말고 용돈벌이로
다른 일을 해 보라고 권했다. 그는 당시 불법 복제 카세트 테이프를
길거리에서 파는 장사를 해 보겠다고 해서 그 장사 밑천은 내가 대
주었다. 그 덕에 2학년이 끝나는 종업식 날 그로부터 카세트 테이프
2개를 선물로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처럼 학비 감면
혜택이 싶지 않았던 때라서 밀린 1기분 회비는 내가 지불하고, 2기분
회비는 우리 반 반장 아버님에게, 3기분 회비는 부반장 아버님께서
사정 얘기를 듣은 후 직접 학교에 오셔서 행정실에 납부해 주셨다.
남은 4기분은 그가 없는 시간에 전체 반학생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일주일 동안 모금한 액수으로 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가 마음을 다칠까 봐 비밀스럽게 도움을 주었던 우리 반
학생들이 대견하다.
그는 그렇게 2학년을 마치게 되었고 3학년 학비는 학교와 교육청의
도움으로 면제를 받아 가까스로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하는 날, 그와
나는 학교 건물 뒤편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락처도, 사는 곳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졸업과 대학 입학이라는 부푼
꿈에 여기저기서 가족과 사진을 찍는데, 그는 혼자였다. 그는 졸업
이후의 어떤 계획도 없었다. 헤어지면서 정말 힘들면 나를
찾아오라고 한마디 해주고는 그와 이별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편지
한 통이 학교로 배달되었다. 이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고,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고…. 뵙고 싶지만 성공하면 찾아뵙겠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자의 주소란에는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라는 글로 채워져
있었다. 답장을 보내지 못하는 그 편지를 나의 교무수첩에 꽂아
두었다. 그 후로 3년쯤 지난 뒤에 또 한 통의 편지가 학교로
배달되었다. 이제 제대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발신자의
주소란에는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라는 글로 채워져 있었다.
그 편지도 이전 편지와 함께 교무수첩에 그냥 넣어 두었다.
그 이후 수년이 흘렀다.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TV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119 소방관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아들들도 그 프로그램을 보고는 매 순간 위험을 무릅쓰는 소방관을
아주 멋진 사람으로 여길 정도였고, 소방관이 되어야겠다는
초등학생들이 많을 정도였다. 어느 날, 그 방송을 보고 있는데 그와
아주 닮은 소방관이 화재 진화를 끝내고 지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늘 마음속으로 궁금했던 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다음
날 그 소방대로 전화를 걸었다. 소방관 중에 이런 이름이 있느냐고
문의하니, 지금은 출동 중이라서 연락이 될 수 없다고 했고, 결혼도
하고 야간 대학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잘 자라주었다는 생각에 정말 감사했다. 그의
상황을 안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스승의 날, 학교
행사로 분주한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아무개를 기억하시겠냐고
하였다. 내가 ‘왜 그 이름을 모르겠니?’라고 반문하니 지금 학교
지하 주차장에 와 있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내려가 보니 하얀 소방관
간부 제복을 입은 그가 서 있지 않았겠는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그는 오늘을 기다리며 남들이 도중에 포기하는 소방관
일을 끝까지 참아내었다고 한다. 화재 현장에서 여러 번 다치기도
했지만, 소방대장이 되어서 나를 찾겠다는 결심 때문에 이렇게
버텨왔다고 한다. 그가 바라던 소방대장으로 승진하던 날, 2일간의
휴가 중 하루를 직접 차를 몰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무수첩에 꽂아만 두었던 2통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그날로
해결되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구장에서 하루하루 숙식을
해결하면서 살아가다가 이렇게 생활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독서실 총무를 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방관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고,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도 소방대 기숙사에서 대입 준비를 하여 야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이쁜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고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이 있는 어엿한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힘들어 할 때, 고등학교라도 졸업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던 선생님 덕분에 공무원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나는 오히려 그가 고맙고 대견했다.
부모님도, 살 집도 제대로 없었고 살아갈 여비조차 제대로 없었지만,
경험도 부족했고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도 주지 못했던
풋내기 교사의 말을 따라 주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선생님 앞에 떳떳하게 나타나겠다는 자신만의 결심을 꿋꿋하게
지켜주었던 그가, 30년 이상 교단을 지켜오면서 거쳐 갔던 수많은
제자 중 여전히 자랑스럽고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이다.